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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지리산으로

편지를 쓰다


지리산 서부능선 세걸산 밑 세등치로 띄우다 (1)

눈이 아직 내리지 않은 채 성탄절이 지나갔어. 발목까지 빠지며 하얗게 찍힌 발자국을 뒤돌아보고 너의 흔적이 아닐까 아쉬워해야 할 눈길은 다가오는 새해로 미뤄야 될 것 같아.

넌 어때. 춥지. 쓸쓸하지. 거기엔 눈이 내렸니. 오고가는 발걸음도 드물 거야. 스치는 바람은 얼마나 매섭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어. 네가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도 이번 가을에 찾아가지 못 했어. 서운하지.

사실은 너를 찾아갔었어. 늦게 갔지. 너는 언제나 10월 첫 주까지만 거기에 머물지. 그 때를 맞추어 가야 되는데 글쎄, 마지막 주에 갔어. 예상했던 대로 너는 없었어. 기다릴 수 없었겠지.

너를 원망하지 않아.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서둘러 제 때에 찾지 못한 내 잘못이지. 나를 탓해도 좋아. 우리가 함께 있었던 전나무 숲 생각나지.

거기에는 너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고 고동색으로 물든 전나무의 이파리들이 잘게 부서져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어. 그것들은 살포시 쌓이고 쌓여 곱고 부드러운 살결을 만들었지.

너의 느낌이었어. 네가 없다고 스치는 바람처럼 돌아 설 수 있니. 너의 포근함을 느끼며 전나무에 기대어 앉았지. 흩날리는 이파리들이 나에게 달려들었어.

너의 속삭임이었어. 눈시울을 적셨다면 믿지 않겠지. 믿지 않아도 좋아. 너를 생각했어.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두 해전 9월 8일이었어. 우리의 만남이 얼마쯤 지난 후 네가 나에게 말해 주었지. 나는 그때 깜짝 놀라며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를 해 두었어. 그래서 지금 기억하는 거야.

늦여름이기도 하고 초가을이기도 할 때, 별을 세 듯 걸어 세등치에 다다랐지. 화려하지 않아도 고운 너를 나는 첫 눈에 알아보았어. 너는 잡초 속에 숨지 않고 오솔길 섶에 서 있어 끼 많은 여인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어.

흔한 풀꽃처럼 단장하지 않고 흰 옷을 왜 입었나. 누구를 기다리다 그렇게 되었나. 가냘픈 모습에서 두레박 속의 선녀일까 생각했지.

야윈 꽃대에 달린 하나뿐인 잎사귀는 너무 외로웠고 작은 키에 어울리는 왜소한 너의 민낯은 웃지 않고 나를 반겼어. 꾸미지 않아도 청초한 너의 말없는 반김은 나에게 추억으로다가 왔지.

‘아픔이 삭아버린 첫사랑’으로 다가선 거야.

누구인가의 눈에 띌까 잠시 피었다가 져버리는 너를 본 순간, 가슴 한 켠에 사라지지 않고 숨어있다 야생화처럼 간간이 고개 드는 깊은 흔적을 떠 올렸지. 네가 아른거리지 않은 적은 없어.

언제나 너의 체취를 느끼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지리산 세등치의 만남이 향기로울 뿐이야. 너의 아쉬움은 전부 내 것이고 나의 그리움은 오직 네 것이지.

지금 너는 땅속에 스며들어 봄을 기다리고 있겠지. 무슨 꿈꾸니. 나도 꿈을 꾸고 싶어. 나는 땅속에 스며들 수 없으니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을 꿈 꿀 거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내년 가을에 만나야 돼. 눈 속에 묻혀서 그 꿈을 꿀 거야.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어. 창밖에는 건밤을 밝히는 돋을볕이 꿈틀거려. 아득한 산머리 위로 해가 떠오르면 세상은 훤해 지겠지.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고함을 지르며 바쁘게 움직여. 너를 잊기에는 안성맞춤이지. 하지만 너를 잊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잊지 않을 것처럼. 안녕.

´98년 눈이 오지 않는 세밑, 지리산 물매화에게

추신 :

계속 눈이 오지 않으면 어쩔까 생각해 봤는데, 너도 걱정되지. 걱정하지 마, 솜털 같은 종이로 너의 이파리를 만들어 허공에 띄울 거야. 온 세상이 다 덮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