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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지리산으로

유서를 쓰다


지리산 세걸산 밑 세등치의 물매화에게

지리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즐겁기만 했어.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들을 넘나들면서 너를 만날 수 있다고 믿었지. 그러다가 잊을 수 없는 가을을 맞이했어. 너를 찾아 나선지 십 년 정도 되던 때였단다.

억새들이 제 몸을 녹여 세걸산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고 있었어. 우리의 두 눈이 마주친 것도 수 년 만에 제대로 갈아입었다는 지리산의 가을빔 때문일 거야. 첫눈에 너를 알아보았지. 키 작은 넌 목을 쭉 빼어 곱게 물든 단풍을 구경하려고 두리번거렸어.

매화를 쏙 빼 닮은 너의 민낯을 보고 이름 없는 골짜기를 잉태한 옹달샘의 물을 떠올렸어. 가녀린 꽃대에 매달린 하나뿐인 이파리는 너의 쓸쓸함을 내게 슬며시 건네주었지. 여리면서도 당돌한 너의 웃음이 내 지친 발걸음을 잊게 했어.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을 때에는 지리산에 갈 수 있어서, 너를 찾아 헤맬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서슴없이 말했지. 널 만났어. 아름다움 때문에 쫓기다가 월계수가 된 다프네처럼 너도 내 손이 닿는 순간 물매화가 되었다면 내 죄가 아폴론만 하겠니.

너를 머리에 이고 서산마루를 넘어 집에 돌아 온 후에 글을 썼어. 널 원고지에 그린다고 하는 것이 맞을 거야. 너로 인해 내가 피해갈 수 없는 글쓰기를 한 거지. 너를 볼 수 없을 계절을 견디기 위한 나의 수행이라고 할까. 앞으로도 어김없이 땅은 얼었다가 풀리겠지. 지리산이 각혈하듯 초록을 섬진강으로 뱉어 낼 때까지 연필을 놓지 않으려고 했어.

그 때 작은 사건이 생겼어. 너를 야생화로 여기지 않고 거실에 놓인 조화로 취급하는 글을 만난거야. 그 책을 읽다가 던지고, 다시 읽다가 또 던지고 했어. 왜 그랬냐고? 너를 지키지 위해서는 책의 내용을 다 알아야겠지? 이를 악물고 끝까지 읽은 거야.

흥분이 가시지 않은 탓에 앉아서만 너를 기다릴 수 없었어. 여행을 떠났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산에 가서 너 보는 것과 해외여행이었거든. 동남아, 서아시아, 유럽을 다녀왔어.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처음에는 장사꾼들로부터 바가지를 썼단다. 상인들은 나를 반가워했어. 속은 것을 눈치 챈 내가 나중에는 미리 아는 척 했지. 그들은 표정을 바로 바꿨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똑똑한 척한다고 비아냥거렸다. 나는 끝까지 우겼어. 어디를 가더라도 상인들은 정당한 대가보다 더 챙기려고 해. 그들과 부딪히며 살아야 되잖아?

로마 시내를 지도만 보고 혼자 걸어 다니다가 길을 잃었을 때 현지 여성을 한 명 만났지. 어찌나 친절한지 감탄 했어. 자기가 가던 길을 멈추고 직접 앞장을 서서 길 안내를 하는 거야. 내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내 손을 붙잡고 이끌었어.

버스를 탈 때였어. 내가 맞게 차를 타나 그녀는 지켜봤고, 차가 떠날 때까지 서 있으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어.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는 연인으로 비춰졌을 거야. 기억 속에서 지워 지지 않는 여인이야. 문득 그녀는 너의 환생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지리산에서 너를 만난 것 다음으로 신나는 일이었지.

너를 만나고, 배낭여행을 다녀오고, 했던 기쁨이 이제는 글쓰기로 바뀌었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오늘도 내일도 보내야겠어. 네가 다시 꽃잎을 피우는 날까지, 너 기다리기는 끊임이 없겠지. 숙명이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작곡을 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고 싶어. 내 가슴으로 너처럼 해맑은 곡을 만들어서 내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로 널 온누리에 알릴 거야.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어. 내 말투가 우습지? 까닭이 있단다. 내 존재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했어. 죽음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지. 그러다가 나를 알았고 죽음을 알았지.

산다는 거, 별 것 아니란다. 우주의 한 톨 먼지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을, 한 구간 뚝 잘라내서 생성과 소멸이라 말하고 있어. 생이라는 이름도 붙였지. 사람들이 삶이네 죽음이네 하며 괴로워하는 까닭이란다. 나는 달라. 인간이라고 하는 나와, 풀꽃인 네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

너를 땅 속에 꼼짝 없이 가둬버린 겨울도 다 갔나 봐. 꽃샘추위 때문에 매화가 힘을 못 쓰고 있지만 곧 개나리 진달래가 활짝 필 것 같아.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산동의 산수유 꽃은 특별하지 않니.

아름다운 꽃들이 피는 봄이 되면 난 슬퍼. 네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서 그래. 봄꽃들이 화창해지면 나는 방 속에 틀어박혀 창문의 커튼조차 쳐버려. 네가 가까운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아 꼼짝도 못하고 웅크린 채 하루를 보내지. 견디기 힘들 때에는 로마의 그 여자를 떠올리며 하루 내, 시를 읽거나 소설을 읽는다.

그럴 때는 늘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는단다. 지금 쓰는 글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 유언이라 여기는 글을 사람에게 쓰지 않고 네게 기대어 쓰는 이유가 있지. 내가 땅으로 스며들면 사람들은 날 잊겠지만 너만은 나를 찾아내지 않겠니? 지금의 나는 사람에게 할 말이 한마디도 남아 있지 않단다. 잿빛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 조금 슬플 뿐이지.

이제 진달래가 너보다 화사하게 하늘에서 내려 올 거야. 배꽃은 너보다 더 눈부시게 하얀 꽈리를 틀겠지. 지리산에 피는 물매화야. 비바람을 받아들이 듯 봄꽃들의 시샘을 견뎌내야 한다. 한 여름에는 폐결핵처럼 너의 몸에 파고든 초록조차 잘 이겨내야 해. 그랬다가 마른 바람 부는 날이 되면 세등치 언덕에서 하얀 꽃이 되어 나를 기다려다오.